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전쟁 (문단 편집) == 베트남 전쟁의 교훈 == 대한민국에서는 장병 정신 교육 및 [[예비군 훈련]]에서도 남베트남의 패망을 예로 들면서 남한의 상황과 접목시켜 안보 교육을 하는 경우가 많다. [[채명신]] 장군이 쓴 회고록 <베트남 전쟁과 나>에서도 베트남 전쟁이 언급된다. 남베트남의 군사력은 규모나 미국이 지원해준 무기면에서 보았을 때 북베트남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했다. 경제력 또한 북베트남보다 좀 더 앞서긴 했다. 그러나 남베트남의 대선 후보가 간첩이었고 남베트남 정치인들은 답이 없는 부정 부패를 일삼았고, 심지어 남베트남의 국무총리도 간첩이었고 북베트군이 쳐들어오자 남베트남 주민들이 환호했고 더 한심한 것은 남베트남의 군인마저 싸우기는커녕 도리어 북베트군에게 문을 열어주었고 북베트군은 하루가 머다하고 남침용 땅굴을 굴착했고 파리 강화 협정 이후에 북베트남군이 재차 침공했다. 그래서 남베트남은 패망했다. 그 이후 공산 베트남에서는 대량 숙청, [[보트피플]]이 다반사가 되었다. 제 아무리 최신식 무기를 압도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해도 [[부패]]하면 멸망을 보는 사례다.[* 훗날 미국이 지원해줬던 무기들은 [[중월전쟁|적화통일한 북베트남이 중국과 전쟁]]할 때 잘만 써먹었다.] 무엇보다도 돈을 지원하는 것은 서유럽 같은 데서는 통했으나 남베트남은 여전히 [[부정부패]]가 판쳐서 지원금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미군을 주기적으로 보내지 않는 한 정권은 무너진다. 그래서 이적 행위는 언제나 어디서나 국가 안보에 치명적인 위협을 끼친다.[* 훗날 젤렌스키가 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최측근도 압수수색하는 이유다.] 1950년대 후반, 남베트남 정부와 북베트남 정권이 비슷한 시기에 수립되었다. 북베트남 정권은 토지 개혁 문제와 코민테른의 제재 때문에 남베트남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지 못했고 양측 모두 내정에 치중했던 시기였다.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부도 나름 토지 개혁을 하기 위해 농촌에 공무원들을 파견했다. 그러나 남베트남 정부 수립 이전에 이미 북베트남 치하에서 토지 재분배가 상당히 이루어졌다. 남베트남의 관료들은 께름칙하게 여기면서도 그 상태를 방치했다. 남베트남의 공무원들은 이미 농민들에게 분배된 토지를 몰수하여 지주에게 다시 돌려 주고 응오딘지엠 정권의 입맛대로 재처분 하려다가 지방 베트콩들에게 암살당하기도 했다.[* 응오딘지엠이 실각한 이유가 이 짓거리를 하는 것을 미국과 남베트남 군부가 용납할 수 없어서였다. 농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할 판에 오히려 뻘짓을 반복하고 있으니 속이 터지지 않을 수가 있나.] 1960년대 중반, 북베트남 정권은 남반부 해방 전쟁을 선포하고 베트콩으로 하여금 무장 봉기를 허락했다. 얼마 되지도 않아 남베트남은 심장부에서 벌어진 동호이 전투에서 개박살나고 나라가 멸망하려는 것을 미군의 지상군 투입이 막아줬다. 그래서 그나마 10년 더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응오딘지엠의 통치 하에서는 최소한의 자주성과 방향성을 가지고 국정 운영을 하였다. 그러나 응오딘지엠 이후 권력의 핵심 자체가 아수라장에 빠지는 동시에 전쟁 상황은 더욱 더 긴박해졌다. 북베트남측과의 교섭 과정은 물론 갈수록 남베트남의 일반적인 통치 구조 또한 미국의 통제하에 넘어가며 남베트남은 역설적으로 응오딘지엠 축출 이후로는 종이 위의 정부가 되어 갔다.[* 출처: J. Race, War Comes to Long An, from War Comes to Long An: Revolutionary Conflict in a Vietnamese Province, (Berkeley: 2010)] 미국-베트남 전쟁,즉 전쟁의 2라운드였던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워낙 유명하고 더 격렬했는지라 세계인들의 뇌리에서 자주 잊혀지는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남베트남 정부의 무능과 남베트남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불신을 유발한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기도 하다. 이 전쟁은 [[6.25 전쟁]]처럼 전적으로 미소 양국에 의해 분단되고 건국된 두 정부끼리 치른 전쟁이 아니다. 영국과 중화민국이라는 두 군정 당사자가 각자의 점령지에서 정권을 수립한 뒤 양 정부 사이에서 전쟁이 발발한 것조차 아니라 식민주의적 야심을 버리지 못한 프랑스의 침략적 행보가 그 직접적인 기원이라는 것. 베트남 전쟁은 근본적으로 프랑스가 개입했던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연장선상에 있다. 영국/중화민국 당국이 철수한 후 베트남에서는 다시 프랑스군과 베트남 독립세력 전체와의 전쟁이 터졌는데, 46년~47년의 기간 동안 공산주의자들이 야욕을 드러내 민족주의/내셔널리즘 세력을 배신하고 내부총질을 가했고, 이에 프랑스는 입장을 재빨리 바꿔서 내셔널리즘 독립운동 세력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 베트남 전체를 군사력으로 장악하는 것은 이제 힘들게 되었으니 일단 더 이질적인 공산주의만 적으로 돌리자는 속셈이었다. 즉, 베트남 쪽의 협력자로써 반식민주의 성향이 강한 내서널리스트들을 아군으로 포섭한 이상, 베트남을 다시 장기적인 식민지로 만드는 건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49년에 프랑스가 베트남국을 깔끔하게 완전한 독립국으로 독립시켰다면 남베트남은 프랑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남아있는 자주 반공국가로써 북베트남과 싸우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식민주의 욕심을 못 버리고 베트남국의 주권을 제약해서 보호국화하는 치명적인 실책을 범했다. 이는 오히려 베트남 내셔널리스트들 사이에서 프랑스에 대한 반감만 커지는 데 일조했고, 식민통치 기간 동안 수도 없이 난립한 반공 독립운동 세력들이 베트남국 체제에 동화되는 걸 거절하면서 정권의 권위가 취약해지고 사회혼란과 부정부패가 창궐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이 틈을 타서 해외에 있던 응오딘지엠이 들어와 54년에 총리직을 맡게 되었고, 결국 그가 독재자로 각성해 다른 반공 내서널리스트 세력들을 숙청하면서 베트남 공화국은 막장국가화된다. 베트남 전쟁은 제한전이었기에 어차피 미군의 존재로 만회할 수 있을 국가 전체의 군사적인 우위보다는 각 지방 군 조직들의 연계가 더 중요했는데, 프랑스의 실책과 지엠 정권의 막장행각으로 이런 지방 군벌들이 체제에 포함되지 못하고 토벌당하거나 해산되면서 베트콩은 수월하게 베트남 공화국의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게 되었다. 근본적으로, 베트남 공화국의 패배는 냉전 시기 CIA의 부적절한 남미 개입과 같은 교훈을 주고 있다. 어떤 나라에서 공산주의 정권을 막겠다고 독재정권을 지원해봤자 오히려 공산주의 및 반서방주의의 세력만 커질 뿐이라는 것이다. 베트남 공화국이 베트콩을 효과적으로 토벌할 능력을 상실한 것은 응오딘지엠이 스스로의 권력 강화를 위해 반정부 성향 군벌들과의 협상을 거부하고, 친정부 성향 군벌들의 정규군 편입을 막고 재정지원을 끊어 해산시킨 데 그 원인이 있다. 만약 미국이 이 짓거리를 적극적으로 막거나, 리엔민 같은 친정부 성향 군벌들에게 CIA 호주머니에서라도 돈을 꺼내줬더라면 베트콩의 세력이 그렇게 강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많은 지원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리엔민은 알아서 미국제 소총까지 복제할만큼 갖출 건 다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군인 월급+강철 수급만 제대로 해줬어도 역량 유지가 가능했다.] 하지만 미국은 반공/반식민주의 성향이라는 이유만으로 응오딘지엠만 믿고 다원적인 베트남 공화국 정치세력들이 하나하나 숙청되는 것에 손 놓고 있다가 결국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끌려들어가고야 만다. 베트남 관광청 홈페이지에선 베트남 전쟁에 대해 '[[http://travel.tourism.vn:808/main/publish/view.jsp?menuID=002001002018&type=P|남베트남의 자유화]]'라 한다. 베트남 전쟁 끝나고 암흑기였던 그후 1983년 레이건 정부시절 [[그레나다 침공]] 공산정권 상대로 승리하면서 오랜만에 완전한 승리를 거뒀다. 약 46년 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도 미군이 철수하면서 제2의 사이공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베트남에서의 철수는 미군의 군사력이 한계가 도달했기 때문이고,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수도 미군이 더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프간 및 탈레반 문제를 중국에 떠넘기려 한다는 기존 해석은 왕이와 탈레반의 회견, 급속도로 붕괴되는 아프간 정부군의 상황을 보았을 때 완벽하게 틀렸다.] 실제로 미군이 철수하자마자 대통령을 비롯한 아프간 정부 수뇌부는 탈출했고 우리나라도 현지 협력자들을 데리고 한국에 정착하도록 도와주는, 매우 유사한 상황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